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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김슬옹 셰프


 



김슬옹은 셰프다. 동시에 플로리스트다. 플로리스트 이전엔 디자이너였다. 언제 또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통의동은 매력적인 동네다. 옛 서울의 모습이 오롯이 살아 숨 쉰다. 80년의 세월을 간직한 보안여관이 남아 있는 것도 그 숨결에 한몫을 더한다. 얼마 전 보안여관 옆에 새로운 건물, 여관이 문을 열었다. ‘아트스페이스 보안1942’. 보안1942는 복합문화예술을 입은 보안여관의 또 하나의 공간이다. 지하 2층엔 문화를 교류하고 만들어가는 보안책방이 있다. 보안책방은 매일 밤 보안술집이 된다. 맛있는 안주와 매력적인 술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정확히는 김슬옹 셰프가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새로운 길이 만든 

새로운 길

시작은 심야오뎅이었다. 심야오뎅은 2010년 처음 문을 열었다. 밤이 되면 문을 여는 마스터의 ‘심야식당’이었다. 부암동 산꼭대기에서 어두운 서울의 밤을 환하게 밝혔다. 맛있는 안주와 술로 사람들의 대화를 이끌었고 온기를 피워냈다. 바로 김슬옹 셰프가 마스터. 운영하던 ‘로열스케치’란 꽃집의 밤이 아까워 심야오뎅을 시작했다. 상상이 잘 안 된다. ‘플로리스트가 운영하는 심야식당?’, ‘셰프가 운영하는 꽃집?’ 김슬옹은 셰프이기 이전에 플로리스트였고 플로리스트 이전엔 시각디자이너였다. 시각디자이너 이전엔? 경찰이 되려고 했다.


아버지가 경찰대에 진학하길 바랐다. 그런 이유로 김슬옹 셰프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검도를 배웠다. 하지만 아버지의 바람을 이뤄드리진 못했다. 경찰대 시험에 낙방했다. 대신 오랫동안 배운 특기를 살려 체육대학에 진학했다. 편입이란 희망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편입마저 쉽지 않았다. 편입에서 전과로, 전과에서 복수전공으로 선택의 폭은 좁아져 갔다. 다행인 건 청강했던 시각디자인 강의에서 새로운 길을 마주했다.


문과 체질인진 몰라도 체대의 군기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웠어요. 사람들하고 어울리지 못했죠. 너무 힘들어서 바로 군대에 갔고, 전역하고 편입학원을 알아봤어요. 편입도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대신 ‘기왕 학비 낸 거 다른 학과 수업이라도 열심히 듣자’고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그렇게 청강한 색채학 강의에서 덜컥 A+ 학점을 맞더라고요. 내친김에 부전공으로 시각디자인을 배웠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디자인 회사에 취업했다.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 부암동에 자취방을 얻었다. 부암동이 발로가 될 줄은 추호도 몰랐다. 아침이면 회사에 갔다. 저녁이면 집에 왔다. 부암동에서의 무료한 일상이 1년째 반복됐을 때 직장을 그만뒀다. 동시에 고민에 빠졌다. ‘무슨 일을 하면 재밌을까.’ 백수가 된 지 3개월쯤 됐을 때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앞서 말한 로열스케치, 꽃집이다.




 

 



셰프? 

플로리스트?

처음엔 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플로리스트였다. 집이 꽃집이었고 꽃 수업이 진행되는 강의실이었다. 매일 같이 수강생들로 북적이는 집, 집 안에서 시들어지면 어김없이 냄새를 풍기는 꽃들. 초등학생인 김슬옹 셰프에게는 고역이었다. 대학생이 돼서야 나아졌다. 누나도 플로리스트여서, 여자들의 무거운 일을 돕기 시작했다. 좀 더 나아가 꽃다발을 만드는 일까지도. 손에 익자 재미도 느꼈다. 5년 동안 어깨너머로 배운 꽃. 자취방에 꽃집을 연 이유다.

부암동 산꼭대기엔 발길이 적다. 생화나 조화를 파는 꽃집을 했다간 망하기에 십상이다. 김슬옹 셰프는 생화 대신 값이 나가는 화분을 팔았다. 대신 누나가 하는 서양 꽃꽂이 일을 도우며 공부했다. 그렇게 실력을 쌓았다. 점차 꽃 수업도 진행하며 관련된 일을 다방면으로 펼쳐나갔다. 예식장 꽃 장식은 물론이고 국회의사당 꽃 장식까지 도맡았다. 실력도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불안했다. 그 불안이 다시금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했다.


사실 불안이 아니라 갈증이었는지도 모른다. 김슬옹 셰프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부암동의 멋진 경치를 공유하고 싶다.’ 꽃집이 있던 산꼭대기는 오가는 사람은 적었지만 경치는 끝내줬다. 밤이 되면 더욱 아름다웠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밤. 낮에 꽃집에 들르는 사람들이 저녁에도 와서 경치를 즐기길 바랐다. 갈증을 해소할 방법을 고민했다. 먹을 걸 팔면 사람들이 잘 오지 않을까? 한 식당에서 먹은 ‘오뎅’에 결심이 섰다.


심야식당을 열기로 결심하고도 고민이 많았어요. 뭘 팔아야 좋을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꽃집을 하고 있으니까 프랑스 가정식을 해 볼까도 생각했어요. 허세 좀 부려볼까 했죠. (웃음) 그런데 누가 봐도 제가 만든 프랑스 가정식은 안 먹을 것 같더라고요. 그러다 아는 사람이 맛있다고 오뎅집을 소개해줬는데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오뎅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때 결심했죠. ‘내가 먹어서 맛있을 정도면 진짜 맛있는 오뎅이다.’



 

 

 

 


부암동 산꼭대기에서 

통의동 너른 도심으로

국물만 맛있으면, 차별화될 수 있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집에서 먹던 어머니의 음식에서 힌트를 얻었다. 김슬옹 셰프의 아버지는 꽤나 미식가였다. 어머니의 솜씨를 보고 자란 탓에 자취방에서도 웬만한 음식은 직접 만들어 먹었다. 오뎅 국물도 맛을 내기 위해 직접 연구했다.


북어 대가리부터 시작해 다시 새우까지. 고기와 해산물을 가리지 않았다. 맛을 낼 수 있을 만한 재료라면 모조리 넣었다. 그렇게 맛을 내려다보니 오래 고아야 했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식당의 가오픈을 하는 날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껏 만들어 놓은 국물을 모조리 버리기도 했다. 무려 4시간을 들여 다시 국물을 냈다. 간장의 비율을 조절했고 식당의 문을 가까스로 열었다. 자취방을 이용한 꽃집의 저녁, 심야오뎅의 시작이다. 


곧장 입소문을 탔다. ‘심야오뎅’과 ‘부암동’이란 해시태그를 건 SNS 포스트가 부쩍 늘었다. 당연한 결과다. 서울의 멋진 야경이 펼쳐지는 곳 아니던가. 주인장이 플로리스트라는 개성까지 더해졌지 않은가. 무엇보다 음식에서 주인장의 고집이 엿보이는 식당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안주로 판매되는 음식임에도 배어든 김슬옹 셰프만의 고집. 그 고집은 또다시 새로운 일을 벌이는 토대가 됐다.



 


심야오뎅을 처음 시작했을 땐 오뎅 조리기를 가져다 놨어요. 대신 오뎅을 꽂지 않고 국물만 담았죠. 손님이 많지 않을 때라 오뎅을 계속 넣어두면 불까 봐요. 오뎅은 탱탱할 때 먹어야 돼요. 그래서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오뎅을 따로 조리해서 국물을 붓고 손님상에 냈어요.

산꼭대기까지 찾아오는 단골손님도 많아졌다. 그중 인연이 될 사람도 있었다. 보안여관의 최성우 대표다. 최성우 대표는 김슬옹 셰프의 고집을 알아봤다. 식당은 물론이고 꽃과 다양한 분야에서 빛나던 다재다능함에 매력을 느꼈다. 물론 김슬옹 셰프는 알지 못했다. 관심도 없었다. 보안여관의 대표라는 건 알았지만 어차피 똑같은 손님이라고 생각했다. 최성우 대표가 먼저 제안했다. 보안1942란 새로운 공간을 오픈하는데 함께하지 않겠냐고. 처음엔 거절했지만 한마디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건물을 같이 기르자는 말에 설득당했어요. ‘이 건물도 기른다는 콘셉트로 지어진 거고, 기르는 데 식물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식물만 해선 안 되고 더 많은 걸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확고한 고집이 

강력한 매력으로


심야오뎅은 산꼭대기에서 지하 2층으로, 더 넓은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찾는 손님이 많아졌고 더 많은 손님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주말엔 새벽 4시까지 하던 영업시간은 새벽 1시까지로 줄었다. 꽃에 좀 더 많은 신경을 쓰기 위해서다. 또 낮엔 플로리스트로 일하다 보니, 문을 늦게 닫으면 심야오뎅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바뀌지 않은 것도 있다. 주인장의 확고한 고집. 김슬옹 셰프의 고집은 오히려 더 확고해졌다.


일부러 간판을 안 달았어요. 저희 가게를 모르는 상태에선 오시지 말라고요. 길 가다 들어온 손님으로선 불평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거든요. 보안책방이란 공간 자체가 생소하기도 하고, 혼자 하는 가게라 바쁠 땐 손님을 잘 못 챙길 때도 더러 있어요. 반대로 알고서 찾아오시는 손님들은 매너와 톤이 확연히 달라요. ‘여기는 이렇구나’ 하고 고려하고 오시는 거죠. 또 그래야 저와 유대가 생길 수도 있고요.



주인장은 ‘가게의 주인은 나다’라는 확고한 철학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공간을 온전히 지배할 줄 알아야 한다. 음악부터 티슈까지 세밀한 모든 것 하나하나 그 철학을 녹여야 한다. 심지어 공기에도. 김슬옹 셰프가 그렇다. 아무 돈이나 벌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집에 매력을 느낄 줄 아는 이들만 만족시킨다. 그러면 돈은 따라온다. 그 매력은 ‘김슬옹’한테서만 찾을 수 있으니까.


김슬옹 셰프는 매일 낮이면 꽃과 식물을 만진다. 플로리스트가 된다. 매일 저녁 8시가 되면 오뎅탕을 끓이고 술을 낸다. 다시 셰프가 된다. 이중생활을 즐긴다. 하지만 이중생활에 만족하진 않는다. 언제고 또다시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새로운 길을 찾으면 또 다른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게다가 확고한 고집까지 갖고 있다. ‘김슬옹 셰프’와 ‘김슬옹 플로리스트’. 인터뷰를 끝내며 둘 중 어떤 직함으로 불리는 게 더 좋으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둘 다 아니었다. ‘김슬옹 씨’였다.




돈 버는 것도 좋지만 본능적으로 끌리는 게 있어요. 배열하고 배치하는 걸 워낙 좋아해요. 그래서 꽃과 음식을 하고 있죠. 보안1942로 내려온 것도 식물과 식당 모두를 좀 더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겠다는 이유 때문이에요. 꽃 수업, 오프라인과 온라인 장사, 심야오뎅까지 동시에 해보려고 해요. 저만의 공간에서 가게를 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패키지 디자인도 다시 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Writer 곽봉석

Photographer 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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