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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

[인터뷰]
300년을 품은 종가의 종부가 사는 법

강릉 창녕 조씨 최영간 종부



종가는 한 시대와 다음 시대를 연결하는 역사의 현장이자, 사람이 사람을 잉태하는 생명의 너른 품이다.

서지골에서 300년을 이어온 창녕조씨 명숙종 종가 최영간 종부.

종부로 살아낸 50년 세월 한가운데, 어머니에서 어머니로 전해 내려온 종가의 음식이 있다.


시할아버지께 받은 귀한 가르침, 경농과 여재


세월의 무늬를 오롯이 품고 있는 창녕조씨 명숙공 종가의 종택. 돌담 사이에 기대선 솟을대문과 그 안 깊숙이 자리한 부엌은 300년의 세월을 품은 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71년 11월에 꽃가마를 타고 저기 보이는 길로 시집을 왔어요. 그때 어머니께서 이불 한 채를 지어주셨는데, 제가 열네 살 때 수놓았던 천 조각들을 고이 간직했다가 분홍 천을 덧대어 이불로 만들어 주신 거지요.”


종가로 시집가는 딸을 위해 밤새 이불을 만들었을 어미의 마음. 어머니의 사랑이 파도처럼 넘치게 밀려왔다면, 아버지의 사랑은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아버지는 서울에 볼 일이 있어 갈 때마다 어린 딸과 아들을 꼭 데리고 가셨다. 서울로 가는 버스는 꼭 ‘새마을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갔는데, 아버지는 휴게소 옆 과수원에서 파는 과일을 딸과 아들 손에 들려주고는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하셨다.


그렇게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어머니를 닮아 ‘손끝 한 번 야무지다’는 얘기를 들었고, 한시를 짓는 아버지를 보며 문학소녀를 꿈꾸기도 했다. 하고 싶은 일도 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맏며느리, 그것도 종갓집의 종부’는 없었다. 하지만 꿈 많은 소녀는 스물여섯이 되던 해 가을, 강릉 창녕조씨 명숙종 종갓집으로 시집을 갔다.





그해 겨울 밤새 눈이 내리던 날. 시조부는 갓 시집온 어린 종부를 불러 ‘농사를 경영한다’는 의미의 경농(經農)과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여재(如在)를 가르쳤다.


“시조부는‘네가 아녀자지만 농사의 법도를 익혀야 한다’며, 농사의 법도가 곧 인생의 법도라 하셨죠.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게 늘 걱정이라 하셨어요. 변한다는 것은 급하다는 뜻이고 급하면 소용돌이가 치기 마련인데, 그 속에서 옳은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如)’를 가슴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경농과 여재는 여든이 넘은 할애비가 어린 종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가르침이자 유산이었다. “세상이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으니, 어미가 자식을 보는 얼굴. 그것뿐이니라. 자식을 보는 어미의 얼굴이 변하지 않듯 네 마음도 변해서는 안 되느니라.” 어린 종부는 시조부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날 밤 ‘여(如)’를 마음 깊이 새겼다. 최영간 종부가 살아낸 50년 종부 인생은 그로부터 시작됐다.





정이 흐르고 예와 효가 담긴 종가의 음식


종부의 삶은 시할아버지의 위대한 유산인 ‘경농과 여재’를 온 몸에 새기는 고된 훈련이었다. 눈과 함께 얼었던 대지가 녹으면 그해의 농사가 시작됐다. ‘마음’이라는 것이 참 신기해서 ‘경농’을 마음에 새기고 나니, 가래질을 하고 모를 심는 것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내기가 시작되면 조진사댁 초가는 질꾼(모를 심는 일꾼)들로 북적였다. 경작해야 할 논이 제법 넓으니 매년 70~80명의 질꾼들을 먹일 못밥을 준비해야 했다.


시집온 첫 해 모내기 날. 시어머니께서는 항아리에서 아껴둔 쌀을 꺼내 담기 시작하셨다. 한 번 두 번…. 끝이 없다. 어린 종부의 눈으로 보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은데, 쌀을 퍼 담는 시어머니의 손길은 멈출 줄을 모른다. “조진사댁이라 하면 은연중에 다들 풍족한 집안이라 생각했지만, 밖에서는 보이지 않은 가난이 구석구석 비밀처럼 간직된 살림이었어요. 그래도 시어머니는 질꾼들을 위한 못밥은 늘 넘치도록 푸짐하게 준비하셨어요. 무엇보다 만드는 이의 정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죠.”


질꾼들을 위한 못밥을 차리다 보면 어느새 봄은 저만치 달아나고, 질상을 준비해야 할 여름이 성큼 다가온다. 질상은 마을의 논을 두루 다니며 ‘품앗이’를 하느라 고생한 질꾼들의 지친 몸을 다스리는 상차림이다. 온 봄을 허리 펼 새 없이 보낸 질꾼을 생각하면 안식구들은 아까울 것이 없다.


모내기를 시작하는 봄에 태어난 병아리가 이때쯤이면 영계가 되는데, 커다란 가마솥에 적당히 자란 영계와 도라지, 인삼, 대추를 넣고 푹 삶는다. 마지막으로 이 무렵 강원도에서 나오는 햇감자 옹심이까지 넣어주면, 대대로 내려오는 창녕조씨 집안의 질상 음식 영계길경탕이 완성된다. 씨종지떡도 질상에서 빠져서는 안 될 음식이다. 이날은 곳간 큰 독에 남겨뒀던 볍씨를 꺼내어 대추, 호박, 쑥, 곶감 부스러기를 푸짐하게 넣어 쪄낸다.






그렇게 만든 질상을 앞에 두고 시할아버지는 마을의 질꾼들에게 올해 스무 살이 된 질꾼 하나를 부탁했다. “앞으로도 자네들이 잘 가르쳐 주어 좋은 질꾼을 만들어 주게.” 시어머니가 지어준 새 옷으로 치장한 어린 질꾼이 판례떡(사내아이가 스무 살이 되어 장정의 능력을 갖췄을 때 질꾼의 일원이 된 것을 기념하는 떡)을 그릇에 담아 질꾼들에게 돌리면, “가래질 솜씨가 좋으니 훌륭한 질꾼이 될 것”이란 격려의 말이 돌아온다. 이날, 부모를 여윈 어린 질꾼에게 마을의 어르신들은 한없이 든든한 부모님이고 아버지였다.


갓 시집온 종부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땀 흘려 일하는 손길이 얼마나 귀한지, 그 수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담긴 음식이 얼마나 중한지를 그렇게 배워갔다.



 



대상(주) 종가집과 함께 이어가는 종부의 마음


모내기 철마다 종가로 모여들던 질꾼들이 옛말이 됐지만, 최영간 종부는 여전히 못밥을 짓고 질상을 차린다. 1998년 시어머니와 함께 질꾼이 머물던 초가를 개조해 ‘서지초가뜰’을 연 것. 투박한 상에는 지역의 흙냄새와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의 마음이 가득하다.


“아침에 신문을 보는데 고추가 비싸니 톱밥을 섞어서 고춧가루를 만들고, 식당에서는 그걸 사다가 음식을 만든다는 거예요. 저런 음식들이 내 아이들의 몸속으로 가겠구나 하니 잠이 오지 않더라고요. ”


그다음부터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봄이면 산이며, 논둑이며, 지천이 먹거리다. 우리 아이들이 이 좋은 것을 놔두고 저런 음식을 먹는구나 싶어, 흙냄새 가득한 식재료로 손님들을 먹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지초가뜰에 오는 이들을 먹이다 보면, 서울에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닿지 않을까’ 하는 어미의 마음. 강릉시와 강릉농업기술센터가 지정한 전통한식 1호점인 ‘서지초가뜰’은 그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경농’의 섭리에 따라 제철에 난 좋은 식재료를 골라 자식을 향한 어미의 마음 ‘여’를 담아 상을 차렸다. 종가 한편에 교육장을 만들어 우리네 음식에 담긴 경농과 여재의 마음에 대해 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니 ‘로컬푸드’의 열풍이 불고, ‘집밥’이란 이름이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딸한테 전화가 왔어요. ‘엄마, 친구들이랑 식당에 왔는데 음식이 꼭 엄마가 해주는 것 같더라’는 거예요. 우리 아이들이 어미 품을 떠나서도 ‘여’가 담긴 음식을 먹게 된 거죠.”


현대식으로 바뀐 부엌은 종갓집 여인의 일손을 덜어주었지만, 최영간 종부는 장 담그는 일만은 여전히 종가의 법도를 지키고 있다. 그해 가장 실한 콩을 정성껏 갈무리해 메주를 띄울 때는 아궁이에 불을 피우는 수고를 감내한다. 종부의 덕목을 삶으로 보여주시던 시어머니는 몇 해 전 돌아가셨지만, 어머니가 담그신 씨간장은 오래된 항아리에 소중히 담겨 있다.





“서지초가뜰의 손님상에는 종가의 된장으로 끓인 장국과 고추장, 막장을 함께 올리는데, ‘장 좀 팔면 안 되냐’ 하세요. 우리 먹고 손님상 차리기도 부족한데 팔 것이 있나요.”
대상(주) 종가집에서 함께 장을 만들어보자 했을 때 ‘그러자’ 했던 건, 빈손으로 돌아가는 손님들을 향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딱 하나 경농과 여재를 담아 달라고 얘기했어요. 우리 땅에서 난 좋은 재료를 가지고 자식을 향한 어미의 마음을 담겠다고 .”
인터뷰가 끝날 무렵, 최영간 종부는 “집에 온 손님을 그냥 보내면 되겠냐”며 종가의 넉넉함을 담아 ‘질상’을 정성껏 차려냈다. 자연의 섭리에 종가의 손맛, 어미의 마음이 더해진 귀한 한 상이다. 





Writer 박향아

Photographer 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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