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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여행

[맛 기행]
뜨끈한 아랫목의 추억

청국장



11월 바람은 차다. 차가운 바람에 사람은 옷깃을 여미고 곡식은 단맛을 몸 안에 채운다. 햅쌀이 나오는 늦가을, 해콩으로 만든 청국장 조합은 최강이다. 깨가 서 말이라는 전어가 둘의 조합 앞에서는 ‘따위’ 취급을 받을 만큼 말이다.




쌀이 가장 맛있을 때 콩도 가장 맛이 있다


11월이 되면 10월에 불던 서늘한 바람이 찬 바람으로 바뀐다. 겉옷은 내려가는 온도만큼 두툼해진다. 산지 출장을 오가는 길에 만나는 수확 끝난 들판은 황량함으로 가득하다. 찬 바람 불고 황량한 길을 지나지만, 머릿속에는 맛이 그려지는 시기이자 실제로 가장 맛있는 계절이다. 10월이면 대략 추수가 끝난다. 수확한 벼는 일정 수준으로 건조하여 보관한다. 1년 중 쌀 맛이 가장 좋을 때가 10월 말과 11월 초다. 윤기와 찰기가 쌀알 하나하나에 차고 넘쳐 어느 반찬으로 궁합을 맞추어도 한 그릇 뚝딱이다.


쌀이 가장 맛있을 때 콩도 가장 맛있다. 맛이 잘 변할 것 같지 않은 곡식도 저장 기간이 길어지면 맛이 떨어진다. 묵은 쌀보다 햅쌀을 찾는 이유다. 강낭콩이나 완두콩은 여름에 먹는 콩이다. 콩국수, 된장, 간장을 만드는 콩은 가을에 난다. 메주를 띄우고, 수개월이 지나야 간장과 메주를 가른다. 된장과 간장을 갈라도 시간을 두고 숙성을 해야 비로소 제 맛을 낸다. 만들어 놓은 된장이 떨어지면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에 속성으로 만드는 장을 삶의 지혜와 엮어 다양하게 만들어 먹었다.







청국장은 볏짚에 있는 세균이 만들어 내는 마술이다.
흔히 세균은 없애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만 인간은
세균을 비롯한 다양한 미생물과 공존하고 있다.





푸근한 온기가 떠오르는 청국장


메주콩에 보리, 메밀, 콩비지 등을 더해 일주일에서 한 달 정도 숙성해서 먹는 장은 지역마다 있었다. 그중에서 대중화된 것이 청국장이다. 다른 속성 장과 달리 콩과 볏짚만 있으면 간단히 만들어 먹을 수 있는 ‘패스트 장(醬)’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삶은 콩에 볏짚을 군데군데 넣고 따뜻한 곳에 2~3일 두면 청국장이 된다. 필요한 것은 볏짚과 40℃ 조금 넘는 공간 뿐이다.


청국장 유래설 중에서 전쟁 때 말 안장 사이에 삶은 콩을 두었던 것이 청국장이 됐다는 것도 어찌 보면 낭설만은 아니다. 사람과 말의 체온이 더해져 청국장 띄우기에 딱 좋은 온도였을 것이다. 아무리 시장이 반찬이더라도 따뜻한 찌개 한 그릇 더해지면 한결 맛이 좋았을 것이다.



청국장 속에 담긴 과학


청국장은 볏짚에 있는 세균이 만들어내는 마술이다. 흔히 세균은 없애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만 인간은 세균을 비롯한 다양한 미생물과 공존하고 있다. 볏짚에 있는 여러 세균 중에 ‘고초균(Bacillus Subtilis)’이 맛있는 청국장을 만드는 기특한 녀석이다. 흔히 낫토와 청국장을 비슷하다고 이야기한다. 낫토 만들 때 쓰는 균 역시 고초균의 일종인 ‘납두균(Bacillus Natto)’을 접종해 만든다. 만드는 방식은 비슷해도 먹는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우리네 입맛에는 생식보다는 찌개다. 


고초균은 단백질 분해효소를 분비해 콩 단백질을 다양한 맛을 지닌 아미노산으로 분해한다. 따로 청국장에 감칠맛이 도는 이유가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인 글루탐산이 많기 때문이다. 청국장 끓일 때 또 다른 감칠맛 재료인 핵산이 많은 버섯, 멸치 등으로 육수를 내면 맛이 더 좋아지는 것도 핵산과 아미노산이 서로 감칠맛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콩 대신 팥으로 만든 청국장


청국장을 만들 수 있는 콩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주로 메주를 만들 때 쓰는 백태를 쓰지만 서리태든, 흑태든 상관없다. 충남 홍성에는 특이한 청국장이 있다. 삶고, 식히고, 볏짚을 덮고, 띄우는 과정은 같지만 콩의 종류가 다르다. 백태가 아니라 팥으로 청국장을 만든다.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듣는다’는 잘 속거나, 남의 말을 잘 믿는 사람을 놀릴 때 쓰는 속담이다. 팥으로 메주를 잘 쑤지 않아서 생긴 속담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팥으로 안 만든 것은 아니다. 팥은 단백질보다 전분이 많아 떡이나 빵의 소로는 적당해도 단백질을 발효하는 메주에는 적당하지 않았을 뿐이다. 조선 시대 문헌에는 백태가 흉년인 해에는 메주 담글 때 팥을 섞어서 썼다는 기록이 있다.


팥으로 만든 청국장은 달곰하다. 청국장 국물을 맛보면 목으로 넘기는 순간에 여린 단맛이 다음 숟가락을 재촉한다. 작년에 출연했던 TV 프로그램 <폼나게 먹자> 중에서 가수 아이유가 연신 맛있다고 하는 장면이 방송을 탔었다. 실제 촬영을 끝내고 물어봤더니 팥청국장으로 끓인 찌개가 가장 맛있었다고 했다. 필자도 전국을 다니며 먹어본 청국장 중에서 단맛이 가장 좋은 게 팥청국장이었다. 청국장을 만드는 예팥은 작고 옹골찬 토종 팥이다. 예팥은 크기는 작지만 다른 팥보다 고소함이 좋아 팥청국장을 만들어도 맛있지만 팥빙수를 하면 더 맛있다. 한 가지 더, 팥은 붉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검고, 노랗고, 푸른 팥도 있다.






김진영 푸드 칼럼니스트
24년간 식품 MD로 활동하면서 식재료 산지를 찾아 전국 곳곳을 누빈 전문가.

여행과 먹거리에 담긴 이야기를 접목해 바른 식재료 콘텐츠를 생산하는 ‘여행자의 식탁’ 대표이기도 하다. 현재 여러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고 방송에도 출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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