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스타일
드라마 <무빙> 속 왕돈가스
드라마 <무빙>속에 등장하는 돈가스는 전형적인 한국식 돈가스다. 일본식 ‘돈카츠(とんかつ)’도 아니고 ‘포크커틀릿(pork cutlet)’도 아닌 ‘돈가스’라 불러야 할 음식이다. 굳이 원조라는 타이틀을 따질 이유가 없이 ‘남산 돈가스’는 대명사가 되었고, 커다란 접시를 가득 채운 크기의 ‘왕돈가스’와 곁들여 나오는 양송이 스프, 접시 한 켠에 배치된 밥과 양배추 샐러드와 단무지, 그리고 반찬처럼 나오는 오이고추까지 하나의 전형이 되어 ‘돈가스’라는 음식으로 불리게 된다.
평범한 우리들, 누구나 사연은 있다
과거의 비밀을 숨긴 부모들은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정보기관의 눈을 피해 사과 농사를 지으며 살던 두식과 미현은 2003년 국정원에 위치가 발각된다. 그때 잡혀간 두식은 15년째 소식이 없다. 국정원의 습격에서 도망친 미현은 홀로 아들 봉석(이정하)을 키우며 떠돌다 지금은 남산에서 ‘남산 돈가스’라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남산 돈가스’는 국정원 요원이던 미현과 두식이 첫 데이트를 한 의미 있는 장소다. 심야영업이 어울리지 않는 남산의 돈가스집. 미현은 “꼭 찾아오겠다”는 두식을 기다리며 그들의 추억을 지키고 있는 중이다.
남산 왕돈가스 그리고 더 특별한 ‘왕왕’
“와...엄청 크네...”
“왕돈가스예요. 모르긴 몰라도 아마 20년 후에는 이 집 때문에 남산이 돈가스로 유명해질 겁니다.”
- 8화 블랙 중 미현과 두식의 대화
“야! 왜 이렇게 많아?”
“왕왕이야. 이건 특별한 거지. 내가 늘 먹던 거야.”
- 4화 비밀 중 희수와 봉석의 대화
1994년 국정원의 정보분석관 미현과 블랙요원 두식은 ‘남산 돈가스’에서 데이트를 즐긴다. 돈가스를 좋아하던 두식은 남산이 돈가스로 유명해질 거라고, 언젠간 돈가스도 배달되는 시대가 올 거라는 실없는 ‘예언’을 한다. 두식은(미현과 관련된 단 하나의 사건을 제외하고) 작전에 실패한 적이 없는 냉정한 블랙요원이지만 미현을 위해 5층 사무실까지 직접 날아와 ‘날으는 돈가스’를 배달해 주는 이벤트를 한다. 미현 앞에서 그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들켜 버리는, 그녀와의 입맞춤에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순정남이 된다. 그리고 그 후 왕돈가스는 오랫동안 이별할 수밖에 없던 두식과 미현을 이어주는 끈이 된다.
2018년 그들의 아들 봉석이 좋아하는 여자 친구 희수를 데려와서 함께 먹는 음식도 돈가스다. 그런데 이번엔 ‘왕왕(돈가스)’이다. 아들의 몸무게가 줄어들어 혹여나 떠오를까 봐, 미현은 아들에게 더 큰 사랑을 담아 ‘왕왕’을 먹였다. 그리고 그 ‘왕왕’은 또 다시 봉석과 희수를 이어주는 특별한 음식이 되고 그렇게 부모세대의 인연이 그 자녀세대로 이어지게 된다. 오래 전 어른들의 왕돈가스가 ‘낭만적’인 데이트 장소였던 것에 비해 아이들의 왕왕돈가스는 이제 일상의 기억으로 자리한다.
순진한 휴머니즘, 그래서 더 마음을 끄는 이야기
“무협지 좋아하나 봐요. 저거 싸우는 얘기죠?”
“이거 그냥 무협지 아닙니다. 멜로 소설이에요. 무협지는 결국 다 멜로에요. 좋은 사람이 이기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끝나요.”
- 11화 로맨티스트 중 주원과 지희의 대화
드라마 <무빙>을 한 줄로 설명하는 문장이 아닐까. <무빙>에는 주원의 러브 스토리처럼 촌스럽지만 그래서 더 보는 이의 마음을 끄는 선한 정서가 흐른다. <무빙>은 세련된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처럼 초인적인 힘으로 적을 날려 버리는 거대한 액션이 아니라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평범한’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로 완성됐다. 100년 전 세련된 ‘경양식 레스토랑’의 메뉴로 한국에 들어왔지만 지금은 동네 분식점의 친근한 메뉴가 된 왕돈가스처럼. 할리우드의 매끈한 슈퍼히어로는 한국으로 넘어와 거대한 대의나 국가가 아닌 내 주변에 있을 것만 같은, 가족과 친구, 이웃을 지키는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완성됐다. ‘마라 00’같은 매운맛이 판치는 요즘, <무빙>의 순한 맛은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 그러나 <무빙>의 인기를 보니 아직 우리들에겐 이런 순진한 휴머니즘이 유효한 것 같다.
◆◆◆
무빙
디즈니플러스(2023년 9월)
연출 박인제 박윤서 극본 강풀
출연진 류승룡 한효주 조인성 이정하 고윤정 김도훈
2023년에 공개된 20부작 드라마. 디즈니플러스의 초대형 프로젝트이자 한국형 히어로물로 주목 받았다. 비범한 능력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국의 굵직한 현대사적 배경 안에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