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스타일
호모 프롬프트
‘노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 그동안 인류는 이전 세대가 켜켜이 쌓아온 연륜과 지혜 그리고 지식을 바탕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준비했다. 하지만 방대한 지식을 스스로 학습하고 데이터화하는 인공지능의 시대를 마주한 지금, 선대의 지식을 학습하는 수고 대신 인공지능과의 똑똑한(?) 공존을 준비해야 할 시기다.
줄 서는 콩국수집의 비밀
2024년 두유 제조기 인기가 여전하다. 주부든 1인 가구든 너나 할 것 없이 몸에 좋고 구수한 두유와 콩물을 직접 만들어 마시는 이 유행에 기꺼이 편승한다. 내가 좋아하는 콩물의 적당한 황금비율을 잘 찾기만 하면 건강까지 챙기는 가성비 좋은 습관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암만해도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파주의 모 콩국수집 같은 맛은 도저히 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차이일까? 주인아주머니께서 하시던 대로 대두는 물론, 늦가을 서리 맞힌 후 수확해 푸른 빛깔 도는 ‘늦서리태’까지 혼합했는데도 뭔가 입에 착 달라붙는 그 콩물이 아니다.
내친김에 파주를, 아니 친애하는 단골 콩국수 집을 찾는다. 이십 년 전 탁자 세 개 놓고 처음 문 연 장사, 서툴다 보니 하루에 고작 국수 한 그릇을 판 적도 있댔다. 떨리는 입술로 어렵게 입을 떼는 아주머니, 손이라도 잡아드리려는 찰나 “그렇게 힘들었던 장사인데, 이제는 이 건물 샀어요.” 겸연쩍게 내 손을 거둔다. 이십 년 만에 번듯한 건물을 지어 올리도록 입소문난 이 콩국수집의 이유를 찾아본다.
면은 차치하더라도 묽은 듯 구수하고 진한 콩물의 비법은 크게 네 가지. 비싸더라도 토질 좋은 장단면의 콩만 고집하는 뚝심, 일주일에 두세 번 길러오는 약수, 15시간 불린 콩 껍질을 일일이 손으로 비벼 까는 정성, 크기 다른 맷돌로 3번 가는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원물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머니의 콩과 내 콩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결국, 똑같은 콩으로도 요리하는 사람과 환경에 따라 백인백색의 콩물이 나오는 법 - 사람의 손길을 거친 콩물 하나 조차 미묘하게 다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호모 프롬프트, 더욱 인간적으로
인공지능이 그림, 소설, 코딩 등 인간 고유의 성역으로 일컬어지던 창작에 도전장을 내민 ‘생성형 AI’의 시대에 역설적으로 떠오른 것은 외려 인간다움, 가장 인간적인 영역이었다. AI와의 경쟁을 넘어 공존에 발맞추려면 감히 AI가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인간성’이라는 입력값과 변수를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호모 프롬프트 -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Homo)’와 사용자의 지시와 명령어를 뜻하는 ‘프롬프트(Promptus)’를 합친 신조어. 인공지능 등 신기술을 능숙하게 부릴 줄 아는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는 단어”가 오늘날의 주요 키워드가 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방송 프로그램 기획안을 생성형 AI로 작업할 때, 그간 서브 작가들이 할 데이터 정리나 기본 구성 결과를 어마어마한 속도로 감쪽같이 내놓는 얘네들을 보자면, 쯧쯧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데이터와 가공할 만한 속도를 무기로 내세운 건 물론, 인간의 사고에 갇힌 게 아니라 기발한 아이디어까지 더해서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AI의 세계는 여기까지다. 잘 발라진 버터 같은 작품이지만, 어딘지 어색하고 미흡한 2%의 그 무엇을 채우는 건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시선과, 사람의 입력 언어다. 생성형 AI는 내 글의 문장 부호, 내 글의 뉘앙스까지 파악한 후 여러 번 호환해서 호흡을 맞춘 뒤 맞춤형 결과물을 내놓으려 애를 쓰는 것이다. 주체가 어떻게 끌고 가느냐에 따라 작품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 결국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마지막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인류의 몫인 것에 감사하고 안도한다.
결국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마지막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인류의 몫인 것에 감사하고 안도한다.
화룡점정이거나, 한 끗 차거나!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든 ‘식食’의 세계. 직립보행과 불의 발달은 인류만의 독특한 식문화를 만들어냈다. 생존을 위해 먹을 수밖에 없는 여타의 동물과 달리 쾌락을 위해 먹는 인간의 욕구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호모 프롬프트’의 시대에 식문화는 어떻게 진화하고 발전할까?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호모 프롬프트’의 세상을 살아온지도 모른다. 숱한 김치찌개 가게 중에서도 독보적인 맛을 자랑하는 가게가 있듯, 세상의 하고많은 식당과 천편일률적인 음식 중에서도 줄 서는 식당엔 다 이유가 있다. 하루에 몇 시간씩 끓이는 육수 뚜껑 위에 붉은 고추를 올려 두고 열기로 말린 고춧가루의 달큼한 매운맛은 확실히 다르다. 면을 익힐 때 뚜껑 덮인 그릇을 두드리며 압력을 조절하는 신기에 가까운 손맛은 가히 흉내 낼 수 없다. 음식 하나에 골몰한 고수들의 ‘한끗’이 맛의 요인이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부엌을 달그닥거리던 엄마들의 ‘한끗’을 추억한다. 더하여 저마다 좁은 오피스텔에서도 간편 조리식에다 저마다 맛의 포인트를 짚어내는 1인 가구 요리사들을 격려한다.
맛난 식재료가 풍성하고
세계 각국의 양념과 향신료가 즐비한 시대,
‘호모 프롬프트’답게 나만의 요리 입력값으로
근사한 시간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맛난 식재료가 풍성하고 세계 각국의 양념과 향신료가 즐비한 시대, ‘호모 프롬프트’답게 나만의 요리 입력값으로 근사한 시간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어느 날은 김훈 작가처럼 힘 있는 문장을 구사하듯 선 굵은 고등어찌개를, 어느날은 소녀 감성 충만한 나희덕 작가의 시처럼 나른한 들깨수제비를. 넘치는 푸드 콘텐츠를 스승 삼되, 내 색깔과 내 취향 한 스푼을 살짝 더하는 인생이야말로 풍미 넘치며 맛깔스럽다. 그리고 이 맛난 시간과 경험은 또 다른 인생의 변주를 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