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스타일
와인잔에 숨겨진 이야기
우리가 와인을 사랑하는 이유는 섬세한 향기와 다채로운 맛 때문이다.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닌, 감각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경험을 선사하는 그 무언가다. 그런데 이 경험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와인잔이다. 같은 와인이라도 어떤 잔에 담아 즐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와인의 풍미와 향을 좌우하는 와인잔
좋은 와인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무척 다양하다. 디캔팅을 통해 침전물을 걸러내고 보다 깨끗한 맛을 음미하는 것도, 각 와인에 어울리는 최적의 안주를 곁들이는 것도 모두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이때, 적절한 와인잔을 선택하는 일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잔의 모양과 넓이, 높이 등 여러 요소들이 와인이 입에 들어오고 향이 퍼지는 방식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와인이 공기와 접촉하는 정도를 결정하는 것도 와인잔의 역할이다. 즉 와인의 풍미와 향은 잔의 모양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와인잔을 잘못 선택하면 와인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느끼기 어려워진다는 의미다.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와인은 잔빨’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도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일례로 입구가 넓은 잔으로 와인을 마시면 고개를 많이 젖힐 필요가 없고, 자연스럽게 와인이 혀에 닿는 부위가 넓어지면서 와인의 맛과 향을 더 풍부하게 느끼게 된다. 반대로 입구가 좁은 잔을 사용하면 와인이 혀의 앞부분에 먼저 국소적으로 닿게 된다. 혀의 앞부분에서 단맛을 주로 느낀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당연히 이 경우 와인의 달콤함을 먼저 만나게 된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와인잔 입구가 바깥쪽으로 벌어지는 형태라면 와인이 향이 빠르게 날아가기 쉽다. 향을 오래 보존하며 음미하고 싶다면 입구가 안쪽으로 휜 잔을 고르는 것이 좋다. 은은한 향을 특징으로 하는 와인이라면 볼륨이 큰 와인잔은 금물이다. 가벼운 와인은 얇고 가벼운 잔에 마시는 게 제격이다.
올바른 잔 선택으로 와인의 잠재력 끌어올리기
소중한 사람들과의 연말 모임을 와인 파티로 꾸미고 싶다는 이들을 위해, 실제적인 예시를 들어보자. 우선 섬세하면서도 풍성한 향을 자랑하는 레드와인이 메인이라면 버건디(Burgundy) 잔을 선택한다. 볼은 와인잔의 몸통 부분을 말하는데, 버건디 잔은 볼이 넓고 입구 부분이 바깥으로 벌어져 와인이 공기와 충분히 접촉할 수 있다. 마시기 전 살짝 흔들어 공기와의 접촉 면적을 넓히면 복합적인 아로마가 잘 피어오르면서 마실 때 코로 더욱 증폭된 향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타닌이 풍부해 자칫 텁텁하게 느껴질 수 있는 강렬한 와인을 골랐다면, 전형적인 튤립 모양에 깊고 넓게 설계된 보르도(Bordeaux) 잔을 택하자. 잔의 입구가 비교적 좁아 입안으로 들어오는 와인의 흐름을 조절하고, 좀 더 부드러운 감칠맛이 살아나도록 돕기 때문이다. 볼이 넓은 형태여서 보다 풍부한 아로마를 느낄 수 있음은 물론이다.
한편 산도가 높고 타닌은 거의 없는 화이트와인의 경우 작은 잔에 담아 마셨을 때 그 신선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산미가 도드라진다는 특성상 공기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이 좋은데, 작은 잔이 공기를 최대한 차단해 주기 때문이다. 크기가 작다 보니 담을 수 있는 양이 많지 않고, 그만큼 빨리 비우고 새로 따르게 되어 차가운 온도로 계속 와인을 즐기기에도 유리하다.
마지막으로 스파클링와인은 탄산가스를 오래 유지시키는 게 관건이다. 그래서 보통 입구는 좁고 길쭉한 모양의 플루트(Flute) 잔이나 튤립(Tulip) 잔을 쓰게 된다. 탄산이 빠져나갈 구멍이 작은 만큼 잔을 입술에 댈 때마다 터지는 기포에 극대화된 청량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잔 안쪽에서 길게 보글보글 올라오는 기포는 시각적인 즐거움까지 더한다.
더욱 생생한 맛과 향을 위하여
꼭 앞에서 언급한 특정 잔이 아니어도 좋다. 와인잔이 어떠한 방식으로 와인의 풍미를 극대화시키는지를 이해하여, 마시려는 와인이 지닌 향미의 특성, 본인과 손님의 취향을 고려해 알맞은 형태의 잔을 고르면 된다. 단,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는 동안 손의 온기가 와인의 온도를 올려 맛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면 와인잔의 얇은 줄기 부분, 즉 스템을 잡고 마시도록 한다. 설거지 시 미세하게 남은 세제가 다음에 마시는 와인의 풍미를 해칠 수 있으므로, 세제를 사용하기보다는 뜨거운 물과 부드러운 천으로 꼼꼼히 세척한 후 자연건조시키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