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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속 국수
한국인 최초로, 아시아 여성 최초로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마츠 말름 스웨덴 한림원 사무총장은 “그녀의 강렬한 시적 산문이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며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한강은 다수의 작품을 통해 개인의 상처와 시대적·역사적 아픔을 다뤄왔다. 상실과 아픔, 생의 의지와 따스함을 대비시키는 다양한 소재가 더 진한 감정의 울림을 전한다. 세 여성의 시선으로 제주 4.3 사건을 바라보는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눈과 국수 한 그릇을 마주했을 때
“말없이 우리는 남은 국수를 먹었다. 누군가를 오래 만나다 보면 어떤 순간에 말을 아껴야 하는지 어렴풋이 배우게 된다.”
- <작별하지 않는다> 中
날이 차가워질수록 우리의 구미를 당기는 건 역시 뜨끈한 멸칫국물을 곁들인 국수다. 김이 펄펄 나는 국물 속에서 한 올 한 올 면발이 풀어지듯 차가운 바람에 얼어 붙은 몸도, 삶의 무게에 경직되었던 마음도 슬슬 풀어지기 때문이다. 현실을 짓누르는 무거운 감정에 휘말려 있을 때도, 이 한 그릇의 온기 속에서 우리는 아픈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인선과 경하가 일을 사이에 두지 않은 순수한 친구로서는 처음 만난 어느 연말 밤. 저녁으로 국수를 먹던 중 쌀가루처럼 입자가 고운 눈이 내리자 인선은 갑자기 국숫집에서 나가 먹다 만 국수도, 경하도, 날짜와 시간, 장소도 잊은 것처럼 눈발을 바라본다. 이윽고 돌아와 남은 국수를 마저 먹은 인선은 18살 때 제주 집에 홀어머니를 두고 가출했던 경험을 털어놓는다.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제주 4.3 사건으로 부모님과 오빠, 여동생을 잃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말없이 우리는 남은 국수를 먹었다.
누군가를 오래 만나다 보면
어떤 순간에 말을 아껴야 하는지
어렴풋이 배우게 된다.”
인선이 그날 경하에게 이토록 어려운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눈송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인선을 말없이 기다려주는 경하라면 당시부터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다큐 영화 작업도, 비극적인 사건과 복잡한 감정의 뒤얽힘도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이지 않았을까? 국수 한 그릇의 따스함이 서로의 마음을 잇는 조용한 다리가 되어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 작별하지 않는 이유
제주 집에 돌아와 치매에 걸린 홀어머니를 돌보며 목공방을 운영하게 된 인선은 앵무새 두 마리를 키우기 시작한다. 새들은 아무리 아파도 포식자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는다고 한다.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라고. 인선은 본능적으로 아픔을 참고 견디는 이 두 새에게도 국숫가락을 먹인다. 공평하게 번갈아 눈을 맞추는 인선에게서 새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비록 새 한 마리는 아픔을 참다 갑작스레 죽었지만, 남은 새 한 마리는 나중에 사고로 서울 병원에 입원하게 된 인선을 대신해 그만의 상처와 아픔으로 칩거하던 경하가 제주로 오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경하는 눈보라를 뚫고 인선의 제주 집까지 갈 만큼 ‘그 새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했으면서도 막상 죽은 새를 보자 자신이 매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정성껏 관을 만들고 추위에 팔다리가 떨려도 땅을 파 묻어 준다.
작가는 이 책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고 했다. 국수, 차, 죽 등 따스한 음식을 나눌 때 조금이나마 흩어지고 사라지는 고통, 각자의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에도 한 번씩 번뜩이는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역사적 사건과 이데올로기적 분쟁도 그러하거니와 인생을 살다 보면 지독히도 쓸쓸하고 아픈 순간들이 있지만,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작별하지 않는다’.
“아무도 남지 않은 게 아니야, 너한테 지금. 그녀의 어조가 단호해서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는데, 물기 어린 눈이 돌연히 번쩍이며 내 눈을 꿰뚫는다…내가 있잖아.”
- <작별하지 않는다> 中
“아무도 남지 않은 게 아니야, 너한테 지금.
그녀의 어조가 단호해서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는데,
물기 어린 눈이 돌연히 번쩍이며 내 눈을 꿰뚫는다
…내가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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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저자 한강
출판 문학동네
발행 2021.09.09
오래지 않은 비극적 역사의 기억으로부터 길어 올린, 그럼에도 인간을 끝내 인간이게 하는 간절하고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가 눈이 시리도록 선연한 이미지와 유려하고 시적인 문장에 실려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