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스타일
스스무 요나구니 셰프
<어린왕자>를 쓴 생텍쥐페리는 ‘사랑이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데 있다’는 말을 남겼다. 올해로 결혼 26년 차, 긴 시간이지만 스스무 요나구니 셰프와 오정미 푸드 아티스트는 언제나 그랬듯 같은 곳을 향하는 중이다. 그곳이 그들만의 핸들을 잡고서 말이다.
‘우연’이 이끌었던 요리의 길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스스무 요나구니 셰프를 만나기 위해 광화문의 ‘오키친3’을 찾았다. 오키친3은 가회동 ‘오키친’, 이태원 ‘오키친2’에 이어 스스무 셰프와 오정미 푸드 아티스트가 2014년에 오픈한 퓨전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거대한 ‘OK’ 간판은 ‘괜찮다,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하는 인사 같았다. 한 발 더 들어서면 마치 부부의 갤러리에 온 것 같다. 벽 곳곳에는 미술을 전공한 오정미 씨의 전통 민화와 현대적인 오브제가 걸려있다. 주방에는 스스무 셰프가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 장식이 눈길을 끈다. 샴페인 글라스에 분홍 리본을 얼기설기 묶었고 옆에는 흰 천에 된장을 묵직하게 담았다.
“분홍은 ‘사랑’을 뜻해요. 된장은 숙성시켜서 실제로 음식에 사용할 계획이고요.”
이곳을 찾는 연인들에게 스스무 셰프가 전하는 재미있는 인사다. 그 속에는 사랑도 된장처럼 오래 시간을 두고 키워가야 한다는 메시지도 읽힌다.
퓨전음식 셰프로서 방송 출연, 칼럼 기고, 제자 양성까지 스스무 셰프의 에너지는 쉬지 않고 타오른다. 1949년생, 올해로 만 68세라는 나이를 실감하기 어렵다. “재미있잖아”라며 웃는 스스무 셰프의 얼굴은 영락없이 청년의 것이다. 20대 시절, 세상으로 호기롭게 발을 뻗을 수 있었던 것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용기 때문이었다.
일본 오키나와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자유로운 삶을 꿈꿨다. 사업체를 운영했던 아버지는 장남 스스무가 대학 졸업 후 회사로 들어오길 바랐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꿈이 있었다. 바로 “죽기 전에 모든 세상을 보고 싶다”는 것.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국으로 향했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무일푼에 영어도 잘 못하고, 영국에 아는 사람도 없는 그를 채용할 회사는 없었다. 운 좋게 면접까지 가도 떨어지기 일쑤였다. 할 수 있는 건 설거지뿐. 하지만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설거지가 훗날 그를 세계적인 셰프로 만들어준 씨앗이 됐다.
“당시에는 아시아인들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아무도 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치노(중국인)’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싫은 내색하지 않고 무조건 ‘예스’라고 답했어요. 제가 실수하면 아시아 전체가 무시당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묵묵히 일했고요.”
요리는 설거지를 하다 어깨너머로 배웠다. 그렇게 시작해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지 8년. 스스무 셰프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참석한 대규모 파티에서 스페셜요리상을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뉴욕에서 만난 한국 여인
스스무 셰프의 다음 행보는 ‘예술’이었다. 뉴욕으로 건너와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부주방장의 자리에 올랐지만, 요리에 쓸 접시를 만들고자 뉴욕의 도예학교에 들어갔다. 나이 마흔에 도전한 일이었지만 도자기를 빚는 순간 3살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좋았다. 그 후로 요리를 그만두고 도자기를 구우며 살았다. 평생의 반려자가 된 오정미 씨를 만난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된장처럼 숙성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일까. 스스무 셰프와 오정미 씨는 무려 3년 동안 서로를 오해하며 살았다.
“전 세계에서 200여 명 되는 학생들이 모여있었어요. 누군가가 제게 말하더군요. 옆 반에 아시아 여성이 있는데 저처럼 요리사라고요. 제가 요리를 그만뒀기 때문일까요. 저는 요리사를 만나기 싫었어요. 그런데 아내도 마찬가지였나 봐요.(웃음) 도자기를 구우러 가마에 오갈 때만 봤지 말을 걸어본 적은 한번도 없었죠. 3년 동안.”
스스무 셰프는 오정미 씨가 사과 모양의 관광용품을 만든다고 생각했고, 오정미 씨는 스스무가 단순히 접시만 굽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시회에 출품한 스스무 셰프의 작품을 보고 오정미 씨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당신의 작품이 마음에 든다고. 이 한 마디는 서로에 대한 오해를 푸는 열쇠가 됐다. 스스무 셰프는 오정미 씨가 사실은 ‘아담과 이브’를 주제로 한 예술작품을 만들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스스무 셰프와 오정미 씨는 뉴욕에서 공동으로 레스토랑을 경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퉜다. 뉴욕의 유명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스타 셰프로 활약한 오정미 씨와 역시 영국, 뉴욕에서 이름을 날렸던 스스무 셰프였기에 각자의 의견이 강했다. 하지만 아무리 일할 때 갈등이 있었어도, 일이 끝나면 언제나 즐거웠다. 스스무 셰프는 스스로도 “이상했다”고 머리를 갸웃했다.
“일할 때 메뉴 때문에 다퉜어도 끝나면 함께 와인을 마시면서 친하게 지냈어요. 보통은 일할 때 얻은 안 좋은 감정을 집까지 가져가잖아요. 저희는 일은 일에서 끝냈던 거죠. 신기했어요. 시간이 갈수록 이 여자가 괜찮다고 느껴졌죠.”
감정은 더 깊어졌다. 여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오정미 씨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경했다. “요리도 잘 하고, 레스토랑 운영도 멋지게 해냈죠. 쉬는 날에 같이 영화보자, 식사하자고 말을 거는 날이 늘었어요.(웃음)”
결혼 초기에는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내 인생에서 제일 좋아하는 시기가 그때”라는 말이 이어진다. 6개월 간 요리해서 돈을 벌고 나머지 6개월은 도자기를 만드는 생활. 돈은 없었고 도자기를 사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하지만 아끼고 아낀 돈으로 파티를 열면 주변에 살던 예술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였다. 각자 손에는 맥주, 와인, 음식 등 한 꾸러미씩 들고.
“그때가 제일 그리워요. 하루 종일 도자기를 만들거나 빵을 구웠던 시간, 아내와 산책을 하던 저녁, 장소는 상관없어요. 우리 둘만 있으면 됐죠.”
결혼 26년 차. ‘아내와 결혼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던 순간’을 묻자 “항상”이란 답이 돌아왔다. “아내가 집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아내와 만난 이 삶이 고마워서 눈물이 나요. 아내랑 만나지 않았다면요? 글쎄요. 상상한 적 없어요.”
아내와 함께 가는 길이라면
1999년, 두 부부는 한국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오정미 씨는 ‘오정미 푸드아트 인스티튜드’를 세웠고, 서울 곳곳에 ‘오키친’을 열었다. 손님에게 정성이 담긴 음식을 대접하고, 두 부부에게 요리를 배운 이들이 쑥쑥 성장하는 공간이다. 도봉산 자락의 텃밭에서 매일 신선한 채소를 수확해 식탁에 올린다.
영국, 뉴욕, 한국. 그곳이 어디든 부부는 언제나 서로의 손을 잡고 나설 것이다. 이들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일까.
“모르지. 아내가 가자고 하면 가는 거야.(웃음) 우리는 여행을 좋아해요. 여행할 때는 항상 자동차에 와인, 살라미 등 음식을 잔뜩 넣고 출발하죠. 시원하게 달리다가 식사하고 졸리면 자고. 좋아하는 음악 틀고요. 재미가 달리 있나요. 같은 곳을 보는데.”
모르지.
같은 곳을 보는데.
우리는 여행을 좋아해요.
여행할 때는 항상 자동차에 와인,
살라미 등 음식을 잔뜩 넣고 출발하죠.
시원하게 달리다가 식사하고 졸리면 자고.
좋아하는 음악 틀고요.
재미가 달리 있나요.
같은 곳을 보는데.
Writer 윤민지
Photographer 김현희
Place 오키친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