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스타일
유의융 주방장
화교로 자랐다. 대학에서 경영학도로 공부했다. 그만두고 주방에서 요리했다. 그 요리의 본 모습을 찾아 중국을 유학했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터득했다. 유의융 주방장은 수없이 돌고 돌았고 종착지는 다시 처음이다. 자신이 집에서 먹었던 그 맛 그대로. 우리에게 중국 정통 음식을 선사한다.
아버지처럼
요리사의 길로
유의융은 주방장이다. 초류향을 이끌고 있다. 초류향은 서울 중구 무교동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중화요리식당. 엄밀히 말해 초류향의 다음 시대를 이끌어 가고 있다. 겉보기엔 30대 중반의 회사원 같지만 주방에선 180° 뒤바뀐다. 뭉뚝하게 보여도 예리하기 그지없는 중식도를,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무거운 웍을 자유자재로 휘두른다. 그렇게 주방에서 요리사들을 진두지휘한다. 손님상에 맛깔난 중화요리를 펼쳐낸다. 나아가 식당의 모든 걸 책임진다. 유의융 주방장의 손길이 곧 초류향의 살림이다.
유의융 주방장도 처음부터 요리사는 아니었다.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경영학에 재미를 느끼진 못했다. 사진을 공부할까도 고민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그렇게 처음이자 본격적으로 음식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초류향의 주방에서 새로운 시작이 꿈틀댔다. 사실 유의융 주방장은 이전까지 요리에 관심이 없었다. 식당 역시 경영하는 사업체라 관계는 있었다고 해야 할까?
초류향을 이끌게 된 건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아버지의 재능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초류향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화교 2세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유의융 주방장은 그런 집안에서 태어났다. 색이 흐트러지지 않은 중국 본토의 음식을 나면서부터 맛보며 자랐다. 알게 모르게 눈이 뜨였다. 어떤 음식이 맛있는 음식이고 별로인 음식인지에 대한 사리 분별이 절로 가능했다. 중국 음식에 대한 미각이 자연스레 교육돼 있었다. 초류향의 주방에 적응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렇게 유의융 주방장은 초류향의 주방을 책임지고 있다. 꼬박 14년 동안 중식 요리사로서 묵묵히 길을 걷고 있다. 사실 단순히 앞선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중국 음식에 미각이 트여있던 것 이상의 이유가 작용했다. 유의융 주방장을 주방에 붙잡아둔 건 ‘중화요리’ 그 자체. 바로 중국 본토의 음식과 꽤나 달라진 한국식 중화요리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짜장면’은 중국의 ‘짜장면’과 맛도 모양도 다르다.
중국 산동지역의 음식이 우리가 먹는 중식, 중화요리의 본류예요. 산동 사람들이 청나라 때부터 시작해 한국에 많이 들어 와 정착했으니까요. 화교 역사가 벌써 100년이 넘어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가 지금 한국에서 먹고 있는 중화요리는 중국 본토의 산동 음식과는 많이 달라요. 중화요리도 시대에 따라 변하면서 많이 변질된 측면도 있죠. 현지화도 상당히 많이 진행됐고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중국의 본래 음식은 어떤 음식일지.
산동지역의
정통 중국 요리를 찾아서
궁금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고 있는 중국 음식의 본 모습이 알고 싶어졌다. 우리의 중국 음식은 짜장면, 짬뽕, 탕수육, 팔보채가 전부다. 유의융 주방장이 어릴 때부터 먹어왔던 중국 음식은 그런 게 아니었다. 초류향의 음식 자체도 그랬다. 아버지는 중국 산동지역의 음식을 그대로 해온 중식 요리사였다. 피는 물보다도 훨씬 진했다. 더 나아가 원래의 중국 음식과 음식을 포함한 중국 문화까지 갈망하게 됐다.
유의융 주방장은 지인의 소개로 전통이 깊다는 식당 ‘경두주로’에 찾아갔다. 순탄하지는 않았다. 경두주로의 총주방장은 유의융 주방장을 주방에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중국까지 찾아온 걸 기특하게 여겼다. 일자리를 줄 순 없어도 궁금한 음식이 있으면 언제든 알려줄 순 있다고 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른 식당에서부터 일을 시작했다.
나름 큰 식당이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만 스무 명이 넘었다. 그중 한 명으로, 칼을 잡는 요리사로 착실히 음식을 배우며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식당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도 성에차지 않았다. 마트에서 파는 소스를 쓰는 곳이었다. 레시피 역시 중국 전통의 레시피가 아니었다. 저렴한 음식을 위한 저렴한 레시피였다. 그 레시피는 결국 본래의 개성이 사라진 중국 음식을 만들어냈다. 궁금증을 해소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식당이었다. 유의융 주방장은 중국 식당이라고 모두가 전통 있는 식당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첫 번째 식당은 정말 아니었어요. 2~3개월 정도 배우고 나니 배울 게 없어졌거든요. 전통과도 거리가 아주 멀었어요. 제대로 된 걸 배우고 싶다는 갈증만 더욱 커졌죠. 음식도 문제였지만 중국 현지의 분위기나 식당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보기 위해 간 거였는데 그마저도 느낄 수 없었죠.
중국으로 떠난 지 3개월 만에 스스로 백수가 됐다. 다시 식당 자리를 구하러 다녔지만 좀처럼 어려웠다. 급여를 받지 않고 일하겠다고 해도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 유의융 주방장은 한 달을 그렇게 허비했다. 절망할 때쯤 기회가 찾아왔다. 옌타이(煙臺), 우리말로 연태의 한 호텔에서 다시 궁금증을 해소할 길이 열렸다. 경두주로 못지않게 유명한 총주방장이 있는 호텔 식당이었다. 다시금 칼을 쥐고 팬을 돌리며 산동지역의 정통 중국 음식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경두주로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않았다.
몇 번이고 경두주로를 찾았다. 총주방장을 만나 궁금했던 음식의 레시피를 물어보며 정을 쌓았다. 우연한 계기로 더 큰 기회가 찾아왔다. 설날이 지나고 다시 찾아간 경두주로에서 기쁜 소식을 들었다. 유의융 주방장은 배우고 싶었던 산동지역의 정통 중국 음식을 경두주로에서 마음껏 배울 수 있게 됐다. 중국 음식의 가장 기본이 되는 기술과 다른 식당에서는 볼 수 없는 옛 중국의 무수한 요리들. 웬만한 중국 식당에서도 보기 힘들다는 샥스핀, 제비집, 해삼, 해구신 등을 활용한 고급 레시피까지도 차근히 몸에 익혀 나갔다.
중국 음식의
격을 올려 놓다
경두주로에서 1년 반이란 시간을 보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중요한 건 유의융 주방장이 그토록 배우고 싶어 했던 중국 정통 음식을 배워왔다는 사실이다. 스물아홉의 나이, 그 사실을 기반으로 초류향을 본격적으로 도맡았다. 기존의 메뉴들을 최대한 중국식으로 바꿔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접하지 못했던 중국 음식을 내놓았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대다수의 중화요리식당의 라조기는 빨갛다. 깐풍기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바삭함을 지녔다. 초류향의 라조기는 아니다. 튀김옷은 기름에 살짝만 튀겨 최대한 얇고 부들부들하다. 소스는 빨갛지 않고 고추만 살짝 곁들여 매콤한 맛을 더한다. 식감도 짠맛과 감칠맛 위주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을 벗어나지 않는다. 유의융 주방장은 아무리 중국 정통 방식이 좋다고 한들 입맛에 맞지 않으면 안 된단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초류향을 채워나갔다. 중국 정통 방식을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거부감이 없는 식당으로 바꿔나갔다. 배달 음식으로 변질된 중국 음식의 격을 한껏 올리기 시작했다.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방송에도 출연하고 음식 잡지에 고정 페이지도 생겼다. 유튜브를 통해 중국의 가정식을 소개하기도 했다. 스스로 궁금해했던 중국 산동지역의 다양한 정통 음식을,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해 나가고 있다. 다양한 중국 음식으로 중국 문화까지 알리고 있다. 결국 유의융 주방장은 아버지가 해왔던 일을 해나가고 있는 셈이다. 자신이 자라며 집에서 먹었던 밥상. 건강한 중국 음식의 맛으로 채운 밥상을 직접 차리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이 생활하는 데 필수적인 것 중에서 음식이 건강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쳐요. 음식이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생명인 거죠. 그래서 더욱 건강한 음식을 만들려고 해요. 먹어서 사람한테 이로울 수 있는 음식을요. 또 사람들이 그런 음식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끔 하고 싶어요. 요즘엔 사찰음식도 배우고 있어요.
유의융 주방장은 앞으로도 음식을 통해 중국 문화를 전파하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엔 잠시 휴식 상태다. 모든 활동을 접고 초류향의 공사에만 집중하고 있다. 초류향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올 12월이다. 중구 무교동에는 새로운 시대를 풍미하게 될 곳이 탄생한다. 유의융 주방장의 초류향이 곧 모습을 드러낸다. 앞으로의 30년이 궁금하다면 조금만 더 기다리시라.
Writer 곽봉석
Photographer 김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