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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여행

[여행]
어느 시간 여행자의 표류기

군산 탁류길


혹자는 이곳을 ‘21세기를 약속 받은 땅’이라고 말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다기능 관광 복합 어항지, 세계 최대의 방조제 새만금이 태동시킨 관광레저·국제업무·생태환경·첨단산업·물류의 21세기형 복합산업도시.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곳은 ‘탁류(濁流)길’이라는 이름 속에 애잔한 근대문화의 유산과 더불어 풍요로운 남도의 들과 바다, 고즈넉한 산들이 어우러진 오랜 시간의 땅이다. 오감으로 기록한 군산의 모습은 그래서 더 애틋하다.



100여 년 전의 인간군상이 살아 숨 쉬는 탁류(濁流)를 거슬러,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되다

군산 내항의 뜬다리. 바닷물은 말끔히 쓸려나가 저 먼 데 가 있다. 


엄마의 목소리를 따라 걷는 탁류길


엄마는 책 읽기를 좋아했고, 다 읽고 나선 자근자근한 목소리로 내용을 말해주곤 했다. 엄마가 오랫동안 좋아한 책은 <토지>, <아리랑> 같은 것이었으니 군산을 여행지로 택한 건 그 기억 때문일 것이다. 이 도시는 일제 강점기 전라도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수탈의 현장으로 급격히 발전했고, 해방 이후엔 시대의 아픔과 중앙 대도시 중심의 발전에서 밀려나 덩그러니 남겨졌다. 시간은 남겨진 흔적을 역사의 유산으로 바꿨고, 그렇게 근대문화거리가 조성되었다. 거리 곳곳에서는 1930년대의 대표작 <탁류>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그린 작가 채만식의 족적을 만날 수 있다.



고우당의 일본식 목조 주택과 정원 


푸르른 내항


이른 시각, 한적한 탁류길을 따라 걷는다. 이 길의 명물 ‘초원 사진관’에는 어느 부지런한 신혼부부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카메라 앞에 선 소극적인 신랑이 영 맘에 안 드는지 신부의 목소리에 타박이 배어난다. 푸짐한 야채소와 단팥빵으로 유명한 ‘이성당’ 앞에는 벌써부터 구불구불하게 손님 줄이 늘어섰다. 야트막한 건물을 지나 군산 내항으로 향한다. 바다를 좋아한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


(좌) 맑은 날씨. 햇빛이 하늘 사이사이로 갈라져 빛난다.
(우)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로 유명한 바로 그곳, 초원 사진관. 



거친 바닷바람, 삶의 고난과 함께 빛바랜 글로벌 7호.
얼마나 많은 곳을 돌아봤을까?



미혹되거나 모험하거나,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시간의 작은 틈에 빠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빛바랜 절간의 고양이


아직 붐비지 않은 때 느긋하게 사진을 찍고 싶어 아침 7시를 조금 넘어 동국사로 나섰다. 한국 땅에 남은 단 하나의 일본식 사찰, 동국사의 진짜배기 묘미는 대웅전 뒤켠에 있다. 낯가림 없는 고양이 서너 마리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풍성한 꼬리에, 석탄으로 그린 듯 선명한 눈썹을 가진 하얀 고양이가 어찌나 예쁘게 굴던지 아주 혼을 쏙 빼놓는다.


(상) 대웅전 앞으로 햇살이 들이친다. 불상에 반사된 한 줄기 빛에 100여 년 전 이야기가 속삭거린다.
(하) 인파를 피해 부지런히 움직인 보람이 있다. 복작복작했다면 요 어여쁜 녀석과 이렇게 독대하지 못했겠지 



모락모락 갓 나온 빵, 역시 지나칠 수 없는 군산의 별미


ㄹ자로 꺾인 기다란 줄의 제일 마지막에 서려니 시간이 아까워 스윽 한번 둘러만 보려 했다. 서울서도 넘쳐나는 게 유명한 빵집. 그런데 이런, 새로 구운 야채빵과 팥빵이 모락모락 김을 내면서 나타났다. 아, 이건 안되겠다. 얼른 줄 끝에 합류했다. 그래 유명한 건 먹어봐야지.


(좌) 속을 꽉 채운 소가 기분 좋게 하는 팥빵.
(우) 야채빵은 꼭 드셔보길 권한다. 물기를 빼서 말랭이처럼 오독오독해진 양배추의 식감이 좋고, 마요네즈의 고소한 맛에 후추가 더해져서 물리지 않고 맛나다. 몇 개 더 살 걸. 



노을에 물든 하굿둑에서 시간이 멈추다


가리는 것 없이 탁 트인 하늘에 노랑 빨강 노을빛이 짙어진다. 철새철이 지나 새 보려는 관광객도 없고, 지나는 사람도 몇몇 없다. 타박타박 걷는 걸음이 적당히 쓸쓸한 게 기분이 괜찮다. 기분 좋게 외로울 수 있는 것. 혼자 하는 여행의 장점이지.


전선 한 줄 걸쳐지지 않은 탁 트인 하늘을 본 게 얼마 만인지. 반갑다, 하늘아. 




냐냐 by 나혜인 여행 크리에이터
붉디붉은 인주 색 스틸레토와 인파에 붐비지 않는 여행법, 언플러그드 뮤직, 향기로운 커피를 사랑한다.

스스로 ‘역마살을 타고 자의식이 뻗치는 대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중’이며,

그 길에서 느끼고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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