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여행
강릉 바다호수길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 건 덜컹거리는 녹색 시내버스의 창 밖으로 파랑이 펼쳐지는 무렵이었다. ‘바다를 보고 싶다’라는 짧은 독백으로 시작한 즉흥 여행. 마침내 마주한 안목 해변의 여름에 한껏 큰 숨을 내쉴 때까지만 해도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윽한 솔향에 이끌려 들어선 숲에서의 또 다른 여행. 강릉 바우길 5구간 바다호수길을 걷는 동안 조금씩 이 도시의 색과 향에 매료됐다.
두 이름을 가진 그림 골목
해안가에 사는 소년과 버스 정류장 건넛집에 사는 소녀는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짧은 골목길에 ‘버스 타는 골목’, ‘바다로 가는 골목’이라는 서로 다른 이름을 붙였다. 보고 싶어 집 앞에 달려갔다가 결국 부르지 못하고 걸음을 돌리기 일쑤였는데, 그럴 때면 벽과 창에 보여 주고 싶은 것들,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그렸다. 얼마 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그 길을 그림 골목으로 부르기 시작했단다. 안목 해변 버스 정류장에서 해변과 커피 거리를 걸으며 어느새 잊고 있던 순수에 젖었다. 길이 끝났음을 알리는 표지판 앞에서 아쉬움에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좁은 건물 틈새로 파랗게 펴 바른 바다 조각이 보인다. 그래, 나는 바다가 그리워 온 거였지.
여름날의 안목 해변
남항진 해변에서 송정 해변으로 가는 길목인 안목(安木)에서, 파도에 가까이 다가가 앉는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음악과 파도 소리가 어우러져 마음에 들고 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여름은 쉬지 않고 감동적인 장면들을 빚어 시선 앞에 내려 놓는다. 맨발로 모래를 차는 스무 살 언저리의 청춘들, 말없이 함께 바다를 보는 벗, 두 어깨가 닿을 듯 말듯 나란히 앉은 연인. 안목 해변의 여름날 오후 풍경은 그동안 잊고 있던 것을 새삼스레 일러줬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
지금의 안목 해변을 만든 것도 오늘 아침 내가 갑자기 그 이름을 떠올리게 한 것도 모두 ‘커피’다. 해변과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들어선 카페는 SNS에 올라올 만한 세련된 인테리어는 아니어도 편안한 느낌이다. 게다가 운 좋게 3층 창가 좌석을 독차지하고 앉으니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해변이 커다란 창밖으로 펼쳐져 짜릿하기까지 하다. 구수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오늘의 커피는 내 취향과 거리가 있었지만 “아무렴 어때, 바다가 있는데”라며 웃고 말았다.
안목 해변도 식음경이다. 안목 해변을 바라 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
목적지를 잊게 만드는 숲
안목 해변에서 송정 해변과 강문 해변까지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동양 최대 길이의 4.1km 소나무 숲에선 누구라도 솔향 가득한 강릉의 매력에 빠질 수밖에. 귀를 간질이는 파도 소리, 들숨마다 흠뻑 스며드는 솔향에 취해 이미 몇 번이나 길을 잃었지만 스마트폰 화면 속 지도를 찾아보고 싶지는 않다. 가능하면 이대로 좀 더 솔숲을 헤매고 싶다.
소나무 사이로 송정 해변의 파란 바다가 보인다.
허난설헌 허초희의 노래
솔숲에서 길을 잃은 걸음이 고즈넉한 사대부가 한옥에 닿았다. 허균의 누이이자 27세에 요절한 조선 최고의 여류문인 허난설헌의 예술혼을 기리는 허균허난설헌생가터는 소박해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솟을대문과 넉넉한 대청, 안채에 모셔진 영정에서 감출 수 없는 품위가 묻어났다.
주변을 둘러싼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윗둥이 벌겋게 벗겨져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달래던 <난설헌집(蘭雪軒集)> 속 섬세한 획들을 떠오르게 했다.
허균허난설헌생가터에는 색색으로 그린 그림이 걸려있다 .
걸음이 멈추는 곳
저녁 여덟 시가 되자 물안개에 가려 부옇게 형태만 보이던 아치형 다리에 형형색색의 불빛이 들어왔다. 흡사 바다 위에 떠 있는 무지개 같은 이 풍경을 오른쪽 방파제 끝에서 내내 기다렸다. 강문 해변과 경포 해변을 잇는 강문 솟대다리와 바다에 비친 색을 감상하며 하루의 걸음을 돌아본다. 축축한 밤공기에 은은히 배인 솔향을 더듬어 본다. 순수와 낭만, 회복 그리고 고요. 강릉 바우길 5구간 바다호수길을 걸으며 얻은 것들은 하루 치 치고는 과분하리만치 넉넉했다. 역시 떠나길 잘했다.
김성주 · 여행작가
바닥난 통장 잔액보다 고갈 중인 호기심이 더 걱정인 어른.
타고난 체력과 무모한 용기로 낯선 도시를 헤매다 보니 어느새 여행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었다.
영하 30도의 러시아 모스크바 풍경을 담은 책 <인생이 쓸 때, 모스크바>와 브런치(brunch.co.kr/@mistyfriday)를 통해 여행작가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