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여행
속을 편안하게 다스려주는 경상도 등겨장
경상북도 팔공산에 있는 한 사찰을 찾았다.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옮겨 길을 걷던 중 눈길을 사로잡는 장면이 있었다. 곳곳에 펼쳐진 장독대였다. 그 안에서는 맛있는 장이 따뜻한 계절을 기다리며 농익어가고 있었다.
장 하나로 차려지는 근사한 밥 한 끼
경상북도 팔공산에는 ‘사리사’라는 작은 사찰이 하나 있다. 이곳은 때가 되면 너른 평지에 된장, 간장, 고추장을 가득 담은 장독대를 넓게 펼쳐놓는데, 이 모습이 가히 장관이다. 이렇게 숙성한 장은 사찰을 찾는 사람들에게 근사한 밥 한 끼를 대접하기 위해 이용된다. 30여 년 전만 해도 집집마다 장을 담그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장을 담가 먹는 곳을 보기 어렵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장을 담그는 것이 쉽지 않은 데다, 마트나 온라인 쇼핑몰에서 다양한 장을 손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맛있는 장은 한식의 기본’이라는 말이 있다. 30여 년 전 내게 처음 음식을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의 말씀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한식을 잘하기 위해서는 장(醬)을 잘 알아야 한다.”
장(醬)은 콩을 주원료로 하는 우리나라 전통 발효 식품이다. 조선시대 농업서인 <증보산림경제>에는 예부터 ‘장(醬)’은 곧 ‘장(將)’으로 통했다고 나와 있다. 온갖 맛을 부리는 장수, 모든 맛의 으뜸이라는 얘기다. 아무리 좋은 채소나 맛있는 고기가 있어도 장이 좋지 않으면 좋은 요리가 될 수 없다. 촌야 사람이 고기를 쉽게 얻지 못해도 여러 가지 좋은 장이 있으면 반찬 걱정이 없다고 했다. 가장(家長)은 모름지기 장 담그기에 뜻을 두고 오래 묵혀 좋은 장을 얻도록 해야 한다고 했을 정도다. 이렇듯 장은 우리 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는 지역마다 토양, 토산물, 풍광이 다르기에 특성에 맞는 장류가 다양하게 발달했다.
요즘은 여러 지역의 전통 음식 칼럼을 쓰러 다니다 보니, 특색 있는 ‘별미장’을 자주 만나게 된다. 별미장이란 메주를 다양한 방식으로 띄우거나 다른 재료를 넣어 특별한 맛을 내는 장을 말한다. 단기간에 만들어 먹는다고 해서 ‘속성장’이라고도 한다.
장은 대체로 오랜 기간 동안 정성으로 발효되는 단계를 거치는 반면 별미장은 짧은 기간에 바로 만들어 먹는 이점이 있다. 서울의 어육장, 강원도의 막장, 충청도의 비지장, 전라도의 집장, 경상도의 등겨장이 그것이다.
겨울 입맛 살리는 구수한 등겨장
경상도 지역은 전통적으로 콩을 이용한 음식문화가 발달했는데, 그중 가장 대중적인 것이 바로 등겨장이다. 보리 등겨로 만들었기에 ‘등겨장’이라고 불렸는데, 흔히 보리를 많이 재배했던 1980년 이전에 만들어 먹었다. 춘궁기에 된장이나 고추장이 떨어졌을 때 며칠 만에 발효시켜 먹던 장류로 성주, 영천, 포항이 주로 알려져 있고 그 이외 지역에서도 많이 만들어 먹었다.
등겨장은 짠맛을 싫어하는 현대인들에게 잘 맞는 장이지만, 염도가 낮기 때문에 상하기도 쉬워 항아리보다는 바로 만든 뒤에는 냉장고에 넣어 발효시켜 먹는다. 구수한 맛이 겨울 입맛을 살려주는 데 제격이다. 채소쌈에 곁들여 먹거나 나물에 무쳐 먹어도 좋고 비빔밥에 넣어 먹는 비빔장으로 먹어도 그 맛이 일품이다. 요즘 문득 등겨장이 생각날 때면 맛을 좇아 음식점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등겨장은 채소쌈에 곁들여 먹거나 나물에 무쳐 먹어도 좋고
비빔밥에 넣어 먹는 비빔장으로 먹어도 그 맛이 일품이다."
추억을 향유하게 만드는 등겨장
만드는 방법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보리 등겨에 반죽해 잘 말린 뒤 분쇄한 가루를 삶은 보리밥이나 메줏가루 그리고 고춧가루나 쌀 조청을 넣어 하루 이틀 숙성해 만든다. 다른 된장에 비해 만들기도 쉽다.
어린 시절 먹기 싫어 이리 저리 피해 다녔던 장이 이제는 지난 유년 시절을 떠올리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음을 새삼 느낀다. 지금도 경상도 곳곳에서 등겨장이 사랑받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러한 추억을 고스란히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 집에서 간편하게 즐기는 팔도 장!
구수함이 살아 있는 청정원 제주보리된장
제주도에서 재배한 100% 제주산 보리로 만든 프리미엄 재래식 된장. 보리로 만든 장은 그 맛이 그윽하고 담백해, 자극적이지 않고 깊은맛을 내는 것이 특징. 경상도의 등겨장처럼 염도가 낮고 순한 맛을 가졌다. 보리된장 특유의 개운하고 담백한 맛을 살리는 국물 요리는 물론 무침과 쌈 요리에도 잘 어울린다.
Writer 권후진 맛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