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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여행

[맛 기행]
세대와 시대를 이어온 그윽한 맛

씨간장

 


2017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의 국빈 만찬 메뉴 중 한우 갈비가 화제로 떠오르며 외신에 크게 보도됐다. 갈비를 구울 때 쓰인 간장이 전라남도 어느 종가의 360년 묵은 씨간장이었던 것. ‘미국의 역사보다 오래된 간장이 메뉴로 제공됐다’는 외신 보도와 함께 나라 안팎으로 씨간장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장류발효 과학의 정점, 씨간장의 달고 깊은 세계에 풍덩 빠져 보자. 




 




귀하디 귀한 씨간장 한 종자의 힘


“집안이 망하려면 장맛부터 변한다.”,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 “장맛이 단 집에 복이 많다.” 이것 말고도 우리에게는 장맛 관련 속담이 참 많다. 우리 삶에서 장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냉장고도 인터넷 쇼핑도 없던 그 옛날, 음식 맛은 오직 장맛으로 결정됐다. 다종다양한 조미료와 전 세계 향신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요즘과 달리, 직접 담근 간장, 고추장, 된장이야말로 음식의 필수 재료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간장은 우리 음식의 맛을 내는 가장 기본적인 양념이며, 한식의 거의 모든 조리법-끓이고, 삶고, 굽고, 찌고, 무치고, 조리고, 데치고, 볶는-과도 찰떡처럼 어울리는 천연 조미료다. 잘 담근 간장 한 숟갈이 음식에 감칠맛과 깊은 맛을 더해주는 복합 조미료의 역할을 수백 년 동안 해온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양념이자 조미료이다 보니 간장은 부르는 이름도 여럿이다. 얼마나 오래 묵었느냐에 따라 간장의 이름이 달라지는데, 막 담근 간장은 햇간장, 1~2년 숙성시킨 간장은 청간장, 3~4년 된 간장은 중간장, 5년 이상 묵힌 간장은 진간장이라 불렀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씨간장. 잘 보존해 오래 묵힌 진간장 중에서도 가장 맛이 좋은간장을 골라 오랜 기간 동안 보존한 간장을 씨간장이라 하는데, 씨간장은 말 그대로 ‘씨앗이 되는 간장이라는 뜻으로, 새 간장을 만들 때 종자로 쓰이는 아주 귀한 간장이다.


 



세월이 빚어낸 놀라운 단맛


묵을 대로 묵은 씨간장에 새로 담근 간장을 붓는 것을 ‘겹장’이라고 하며, 씨간장은 햇간장의 발효를 도와 집안 고유의 간장 맛을 대대로 물려주는 역할을 한다. 씨간장이 있기에 간장의 고른 맛이 수십 수백년 동안 면면히 이어질 수 있다. ‘간장’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맛은 짠맛이다. 너무 짜다 못해 쓰게 느껴져 몸서리쳐지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잘 묵힌 간장은 깜짝 놀랄 정도의 단맛을 선사하는데, 설탕이나 첨가물을 넣은 단맛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만들어낸 천연 단맛이 감돈다. 실제로 염도 측정을 했을 때 1, 2년 된 간장이 가장 짜고 담근 지 오래될수록 염분이 덜하다는 결과에서 알 수 있듯, 씨간장이 달게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진짜 단맛이 우러나기 때문이다. 청와대 국빈 만찬에 쓰인 360년 묵은 씨간장 또한 재료 천연의 깊고 그윽한단맛으로 한우 갈비의 품격을 더했다는 찬사를 받았는데, 그것이 바로 씨간장의 맛이다. 그렇다면 씨간장의 원리는 무엇일까? 씨간장 한 숟가락 속에 발효과학의 신비가 숨어 있다. 간장의 첫 번째 제조 과정은 자연 발효된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최소 3, 4개월 숙성시키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숙성 과정을 통해 수용성 단백질 분해물(아미노산, 펩타이드)과 지방의 분해 산물까지 녹여내는데 이때 각종 유기산, 핵산, 젖산 등 인체 유익균들이 생성된다.


 



맛을 넘어 약이 되는 발효의 힘


이렇게 생성된 유익균이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더 농축된 유효 발효균으로 살아남고, 이 유효균들이 햇간장으로 옮겨진 뒤에도 그대로 활성화되어서 똑같은 맛의 간장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잘 보존된 씨간장 한 바가지가 흉하게 변해버린 마을 전체의 간장을 살려냈다는 옛 일화에서도 볼 수있듯, 씨간장의 힘은 그야말로 막강하다. 이는 곧 씨간장 속에 숨어 있는 발효의 힘, 유익균의 힘, 그리고 시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조화의 힘이다. 수필가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이라는 수필에는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라는 유명한 문장이 나온다. 신혼부부의 살림이 가난해 찬거리가 떨어지자, 직장을 잃고 아내 대신 살림하던 남편은 일하러 나간 아내를 위해 어렵게 밥상을 차려 둔다. 밥 한 공기와 간장 한 종지뿐인 밥상에는 쪽지 한 장이 놓여있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남편의 쪽지를 본 아내는 감동해 눈물을 흘리고, 생에 가장 맛있는 밥을 먹는다. 혹시 남편이 차린 유일한 반찬인 그 간장이 씨간장은 아니었을까? 오래 묵어 달콤하고 단백질, 미네랄등 각종 영양소가 풍부한 씨간장 한 종지면 다른 반찬 필요 없이 밥 한 그릇 뚝딱했을 테고, 그렇다면 이 문장 또한 ‘왕후의 밥, 왕후의 찬’으로 고쳐 써야 옳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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