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스타일
나의 구원자
우리가 구원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인생이 대체로 성공 적이기 때문이다. 성공은 억압의 산물이다. 우리는 적절하게 욕망을 억압했으므로, 나름 성공했다. 인생이 성공한 만큼, 그 성공에 집착하는 만큼, 구원은 요원해진다. 사랑으로는 구원이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답할 것이다. 그럼, 사랑하고 결혼한 우리는 구원됐을까. 답을 내리기 곤란할 것이다. 이 모순에 진실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한다고 믿는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도 그를, 그도 나를 구원하지 못했기 때문에.
억압에서 벗어나야 ‘사랑’도 가능하다
어떻게 하면 사랑으로 구원이 될까. 답은 ‘붕괴’에 있다.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이 서래에게 한 말, “나는요, 완전 히 붕괴됐어요”. 여기서 구원이 시작된다. <아가씨>에서도 마찬가지다. 히데코가 숙희를 일러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 의 구원자”라고 했을 때 구원은 실현된 것이다.
붕괴되고 인생 망치는 사랑, 해본 적 있는가. 무엇이 붕괴되 고 망쳐져야 하는가. 현실적 토대다.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 평판, 신념, 지켜왔던 도덕 같은 것이다. 해준은 자신이 붕괴됐다고 했지만 엄살이었다. 그에게 붕괴된 것은 경찰로서의 자부심 정도였다. 그때까지 그에게는 여전히 가족 시스템이 있었고, 직장과 명성도 있었다. <아가씨>에서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이 실현된 것은 두 사람 모두 ‘붕괴’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런 붕괴, 아무나 못한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는 흔히 술잔을 치켜들고 “먹고 죽자” 외친다. 붕괴를 향한 충동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 아직 퇴화되지 않았다.
붕괴의 능력이 잔존해야만 ‘사랑’도 가능하다. 사랑은 상투 적인 연애가 아니다. <헤어질 결심>의 서래, <아가씨>의 히데코와 숙희는 상투적인 연애를 하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은 기괴할 정도로 이상하다. 숙희는 첫 정사 때 이렇게 말한다. “아가씨, 어쩜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타고 나셨나 봐요”. 히데코의 성적 능력이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욕망을 억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관계에서도 우리는 ‘보여지는 나’를 의식한다. 뱃살이 신경쓰이고, 상대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된다. 우리가 학습 한 그 ‘오르가슴’이라는 것에도 집착한다. 도대체 내가 느끼는 것이 오르가슴인가 아닌가. 그런 지적인 질문이 성관계를 방해한다. 성관계를 성공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성 관계를 억압한다. 성관계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그나마 덜 실패할 수 있다.
서래가 아름다웠던 이유
서래가 아름다워 보였다면, 혹시 그런 아름다움을 갖고 싶다면, 방법이 없지 않다. 충동대로 살면 된다. 그녀는 삼시세끼 밥을 먹지 않는다. 자신이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만 먹는다. 생각해 보면, 적당히만 먹는다면 아이스크림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이 고루 들어 있는 괜찮은 음식인 것 같기도 하다.
먹는 것뿐만이 아니다. 폭력적인 남편에게 협박당하고 맞고 살았기에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그를 죽게 한다. 해준은 왜 경찰을 믿지 못했냐 다그쳤지만 경찰이 서래를 믿어줄 리 없다. 경찰에 신고했다면 더욱더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서래의 이 말은 진실이다.
그녀는 욕망에 충실하다. 그녀는 해준이 보고 싶어서 무작정 해준의 근무지 ‘이포’로 온다. 그녀는 해준을 가지려 한 것이 아니다. 해준의 아내를 질투하지도 않는다. 사랑받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해준의 곁에서 그를 보는 것, 해준을 사랑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녀는 세 상 무해한 눈으로 해준에게 말한다. “편하게 대해 주세요, 당신의 피의자로서”.
그녀의 사랑은 ‘피의자’에서 ‘미결수’ 되기로 이어진다. 왜 미결수를 자청했을까. 해준이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해준의 아내가 말한 대로, 그는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 있어야 행복한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 행복의 반대말은 무기력이다. 끝없이 몰입하고 탐색할 수 있는 미결사건이 그에게 삶의 동력이 된다. 서래는 그의 욕망을 읽었고 그의 미결수 가 되기로 한 것은 그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해준의 욕망을 위한 결정이었다. 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 그것이 그녀의 욕망이었던 것이다.
인생, 남은 과제
영영 욕망대로 사랑을 할 수 없을 것 같은가. 역시 방법은 있다. 지금은 나름의 성공을 위해 남들처럼 살고, 종내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 가령 나이가 일흔쯤 되었을 때, 그때 세상을 조용히 소외시키자. 내 안에서 아직 남아 있을 욕망을 가늠해 보자. 70에도 가능하다. 70에 생애 최초의 사랑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늙어서 외로움을 없애기 위해 연애감정 따위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욕망으로서의 사랑도 가능하다. 지금은 밥벌이도 해야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고, 노후도 준비해야 하니까 욕망은 잠시 유예. 인생은 길고, 구원은 스스로 욕망대로 사는 자에게 임할 것이다. 구원은 신이나 거대한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자로부터 나를 구원하소서”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세속적 기도다. 구원은 신이 아니라 욕망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진다. 70까지 욕망의 능력을 잘 보존 했다가, 욕망으로 인생 망치면서 구원으로 향해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일지도 모른다. 언제든 인생 망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은 세상이 두렵지 않다. 아마 이 준비 때문에 인생이 더 재밌어질 것이다. 대범함과 섹시함은 덤으로 얻게 될지도 모른다.
인문학에서는 욕망을 어떻게 다룰지가 궁금한 독자들을 위한 추천도서
욕망과 탐욕의 인문학
저자 차홍규 / 아이템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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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탐욕의 인문학>에 그려진 46가지 그림의 주제는 한마디로 ‘사랑에 이르는 46가지 러브로망’이다. 그 길이 팜므파탈의 치명적 유혹이든, 금지된 사랑의 욕망이든, 권력욕으로 빚어진 복수의 사랑이든 사랑은 그렇게 지고지순과 치명적 광기 사이에서 우리를 유혹한다.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
저자 심강현 /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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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철학자’로 불리는 스피노자는 자 신의 대표작 <에티카>를 통해 우리가 슬픈 감정의 늪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조언해 준다. 저자는 옛이야기 같은 풍부한 예시나 비유, 스피노자와의 가상 대화 등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스피노자 철학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
저자 최진석 /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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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그리는 무늬>는 인문학이 오늘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인문학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독립적 주체가 될 수 있는지, 인간의 욕망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문학에 대해 품어온 질문과 호기심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책이다.